토대로 항상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으며 또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. 문인화풍과 서양화법을 기초로 한 이색적인 화풍이 공존한 시기로, 이러한 양식은 장습업의 다양한 소재의 작품을 통해서 잘 나타나며, 때로는 일본회화의 발전에 큰 자극과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(정선아, 2004).
오원 장승업생애와 작품 감상
1. 조선말기 회화의 특징장승업의 시대 바로 전인 18세기는 영조(재위 1725?1776)와 정조(재위 1777?1800)시대, 즉 미술사에서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확립된 동시에 우리 역사상 문화의 최전성기로 간주되던 시대였다. 이와는 대조적으로 장승
특징으로 하는 안견파 화풍은 중기 화단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일본 무로마치[室町] 시대의 수묵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. 중기(1550~ 1700)에는 정형산수화에서 안견파 화풍이 계속 유지되는 한편, 절파풍(浙派風)이 가미된 짙고 평판적인 강렬한 수묵법에 의한 소경인물화(
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. 겸재의 화풍은
많은 후배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겸재 일파를 형성하였으며, 민화의 금강산 그림에서도 그 잔영을 엿볼 수 있다.
③그의 진경산수화의 의의?
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그간의 병폐와 누습을 단번에 씻어버렸고, 그 결과 조선의 산수
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,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. 임금의 명을 받드는 궁중 화사로서의 명성도,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, 가정 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구속일 뿐이었다.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.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
특징 중 하나가 기록 문학(수필)이 많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. 이 시기의 수필들은 일기, 기행, 내간, 평론, 기타의 글들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운문의 투를 벗어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. 초기에는 한문으로 된 수필이 많았지만 후기로 오면서 차차 한글로 된 작품
장승업(張承業)系와 허연(許鍊)系의 계보가 형성되어 현대화단으로 이어졌다.
Ⅱ. 추사김정희의 생애
김정희는 정조 10년(1786년) 10월 3일에 지금의 추사고택에서 한다리 월성위가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조판서를 지낸 유당 김노경과 김제군수 유준주의 따님인 기계유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. 본
중요한 기회가 되었다. 현감 퇴임 후의 만년에는 지방의 권농(勸農)을 지내기도 했는데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, 1797년에는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. 이러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장사로 부를 축적한 김한태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대가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.